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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비 과학자가 나쁜 정치가를 만났을 때 - 트로핌 리센코와 소련 농업의 몰락


얼마전 SNS 를 통해 "물을 끓이면 식은 후에 중금속이 생기므로 찬 물을 마시는게 좋다" 라는 중세 시대 연금술사가 할 법한 소리를 건강 상식이라고 전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이런 글이 타임라인에 뜨지 않도록 차단했지만 '백신 접종 거부" 나 "해열제를 먹지 말자"거나 "AIDS 괴담" 등 정신이 몽롱해지는 각종 건강 관련 괴담들을 보니 많은 과학자들이 왜 이런 사이비 과학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치열하게 싸우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주류로 올라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니 사이비과학자와 나쁜 정치가가 만나서 벌어진 소련의 만성적인 식량 부족과 이의 원인이 된, 소련의 농업과 생물학을 망쳐 먹은 리센코에 대해 이야기 해봐야 할것 같다.


니콜라이 바빌로프

19세기말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바빌로프는 소련의 생물/유전학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종자 개량을 통해 식량을 증산해 소련과 나아가서 전 세계에서 기아를 몰아낼 위대한 세계적인 식물/식량학자였다.

식량 증산을 위한 다양한 씨앗의 중요성을 깨닫은 그는 이란, 아마존의 우림지대, 미국, 남미, 당시의 조선등 전 세계를 돌며 씨앗을 수집하였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 그의 교통 수단은 당나귀였으며 현지 농부들의 경험을 귀 기울여 듣기 위해 현지 사투리를 포함 15개의 언어를 학습한 열정적인 연구자였다.


다양한 대륙을 누빈 그의 탐사는 산적을 만나서 겨우 목숨만 건져서 도망치기도 하고 당나귀가 계곡에 빠지기도 하고 말라리아와 풍토병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등의  엄청난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수집한 씨앗은 그가 설립한 종자은행에 보관하여 멘델의 유전 법칙에 근거하여 척박한 소련 땅에서도 잘 자라는 종자로 지속적으로 개량하였다.


하지만 레닌이 사망하고 소련의 권력 지형은 바뀌었고 공업화를 위해 농업 집단화를 강행한 스탈린은 종자 개량을 통한 지속적인 식량 증산에 대해 탐탁치 않게 여겼고 획기적인 식량 증산을 바빌로프에게 압박하였다.

트로핌 리센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리센코(1898 ~ 1976)는 한 지방 연구소에서 식물의 춘화 처리(어떤 식물들은 저온을 경험해야 파종후 꽃눈 형성이 잘 된다고 하며 인위적으로 저온을 체험하게 하는 것)를 연구하고 있었다.


리센코는 벼에 대한 춘화 처리로 명성을 얻었지만 문제는 현재는 폐기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믿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용불용설에 의거해 춘화 처리를 한 식물은 형질이 자손에게 전달되므로 자손은 별도의 춘화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고 이에 따라 춘화 처리하지 않은 씨앗을 파종했다.


그 해 겨울은 유독 따뜻했는지 춘화 처리를 하지 않은 씨앗으로도 소출을 거뒀고 체계적으로 과학을 배우지 못한 리센코는 자신의 춘화처리 이론이 맞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나쁜 일이 그렇듯이 관영 프라우다지의 기레기가 리센코의 실험  결과를 알게 되었고 "농민의 아들이 맨발로 일군 혁명적인 결과" 라는 인과 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기사를 신문에 내면서 리센코는 일약 모스크바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정치와 권력의 맛을 본 리센코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강조하며 스탈린과 공산당 고위 간부들에게 바빌로프와 생물학자들은 서방의 근거없는 학문인 생물학과 유전학을 신봉하는 무능하고 사상이 의심되는 이들이라고 공격하였다.

더불어 우크라이나 대기근등 소련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강조하였고 용불용설에 근거한 엉터리 이론과 "빽빽하게 심기", "깊게 갈아서 경작하기", "비료를 삼가기", "극단적인 해충박멸" 에 기반한 농법을 통한 즉각적인 식량 증산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바빌로프의 최후

리센코의 엉터리 이론은 어이없게도 스탈린의 지지를 얻었으며 그 주된 이유는 그가 농민 출신으로 출신 성분이 우수했고 당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으며 그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에 오염된 서구인이라도 소비에트의 체제에서 살게 되면(이념의 춘화 처리?) 자식들도 별도의 교육없이 공산주의자로 태어나므로 공산주의적 세계관에 적합하다는 이유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공산주의/자본주의 모두 상대방 진영의 사상을 일종의 질병으로 보았고 치료가 필요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리센코 일파의 지속적인 공격에 결국 바빌로프와 유전학자들은 몰락하였고 KGB의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에게 숙청당하고 말았다.

주된 숙청 사유는 서방의 지시를 받고 고의적으로 농업을 망쳐먹어 우크라이나 대기근등 소련의 식량위기를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바빌로프의  목숨을 걸고 세계의 오지를 돌며 씨앗을 수집한 탐사는 브르조아의 유람으로 격하되었고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과학자들의 탄원을 통해 죽음을 면하였고 시베리아의 수형소에 수감되었다.


수형소에 수감된 바빌로프는 급격히 쇠약해졌고 씨앗 개량을 통한 식량 증산으로 인류의 기아 추방을 꿈꾼 위대한 학자는 수용소에게 굶어죽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리센코의 부상과 몰락

리센코 일파는 지속적으로 정치적인 의도와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과학 이론을 난도질하였으며 자기의 뜻에 반하는 과학자들을 서방의 간첩으로 몰아 시베리아 유형이나 총살형에 처했고 이를 통해 생물학계와 농업계의 독재자로 등극하였다.

리센코는 소련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과학 아카데미 유전학 연구소 소장의 자리에 올랐고 3 번의 스탈린 상과 레닌 훈장을 8번을 받는등 최고의 영예를 누렸지만 리센코의 권력이 커질수록 소련의 생물학과 농업의 그늘은 커졌으며 결국 소련의 농업은 리센코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소련은 만성적인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스탈린이 죽고 흐르시초프가 집권했어도 리센코의 영향력은 건재했고 "DNA의 이중 나선 구조 발견"으로 세계가 떠들썩 했지만 리센코는 DNA는 서방의 음모이며 존재하지 않는다며 DNA 연구를 하려는 학계의 요구를 일축해 버렸다.


이후 흐르시초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가 집권하게 되면서 그의 엉터리 이론은 학계의 거센 비판을 받았고 결국 리센코의 이론은 학계에서 퇴출되었지만 그가 소련의 생물학과 농업에 남긴 상흔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리센코가 남긴 상흔은 소련뿐만이 아니었다.

마오쩌뚱의 주도로 농업과 공업의 비약적인 증산을 의도한 대약진운동은 리센코의 엉터리 이론과 "빽빽하게 심기", "깊게 갈아서 경작하기", "비료를 삼가기", "극단적인 해충박멸"의 농법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농업 정책에 반영하였고 참새를 곡식을 먹는 해로운 새로 지정해 국가적으로 참새를 박멸하는 어이없는 짓을 벌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대약진 운동은 식량 증산은 커녕 엄청난 흉작을 불러 일으키며 실패하였고 4,000만명의 아사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맺음말

과학은 경험주의와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근거하여 실험을 통해 얻어낸 지식 체계이며 여기에는 이데올로기나 방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과학 이론에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개입시켜서 과학 이론을 난도질하고 정치가의 입맛에 맞는다는 이유로 리센코같은 사이비의 손을 들어준 스탈린같은 나쁜 정치가와 지극히 경직된 공산주의 독재 체제와 무자비한 숙청이 이런 사태의 주요 원인일 것이다.


유전학자라는 이유로 처형되는 일이 발생한 지 불과 60여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로부터도 어쨌든 과학과 인류의 지성은 계속 진보하였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과 공중 위생의 개선으로 인류의 삶의 질은 향상되었고 출산은 예전만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 아니며 유아 사망률은 줄어들었고 평균 수명은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대다수의 인류가 시달린 식량 부족을 해결한 것은 프리츠 하버가 질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여 만든 화학 비료였고 이로 인해 멜서스의 암울한 전망을 넘어서서 인구는 현재처럼 폭증할 수 있었다.


해열제가 없던 시대를 상상해 보자. 갑자기 원인 모르는 고열에 시달린 아이는 죽거나 혹은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되는 일이 흔한 시대였다.

항생제가 없던 시대는 작은 상처가 덧나서 고통을 받거나 생명까지 잃는 게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었다.

제너가 종두법을 발명하기 전까지 천연두는 공포의 역신이었고 그저 덜 해를 끼치고 곱게 나가시기만을 바랄 수 밖에 없었다.


환경의 소중함을 알고 자원을 소중히 아껴 쓰고 친환경적인 생활을 실천하는 이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존중받아야 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의 삶을 끌어 올린 상하수도/전기, 화학비료, 백신, 해열제등의 의약품을 적대시하는 것은 인류가 이룩한 지식과 이성을 무시하고 공통체를 붕괴 시킬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과거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너무 멀리 왔고 나는 예전 조상들이 살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